당대 임금과 무능한 장군의 '대환장' 콜라보,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다

1597년 8월 27일, 일본 수군에 의해 대패한 조선 해군의 무패 기록이 무너졌다. 해군은 큰 인명 손해를 입고, 국내 정치와 사회경제적 기반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패배의 원인은 원균이라는 무능한 장수의 리더십 부족에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며 상관인 이순신 장군을 모함한 후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했고, 그 결과 병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는 칠천량해전에서 무리한 항해를 감행하고 적의 기습에 의해 주력선인 판옥선을 잃었으며, 결국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처벌받았다. 결국 원균은 전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섰으나, 절대적으로 역량이 부족했던 그는 일본 수군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칠천량에 주둔했고, 결국 적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전투 중 조선 수군의 지휘부가 전멸하고, 원균은 주력 함대를 불태운 뒤 도망쳤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힘들여 쌓은 판옥선이 모두 소실되었다.

 

칠천량해전 이후 원균은 자취를 감추었고, 조정에서는 그가 전사했다고 발표했으나 도망쳤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 수군은 큰 피해를 보았고, 정유재란은 전면전으로 번졌다.

 

그러나 전쟁 후 원균은 이순신과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으로 추증되었고, 매년 그의 제사가 치러진다. 이는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두 장군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현재 원균의 묘는 경기도 평택에 있으나, 그의 시신은 경남 통영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